VOLUME II · UNIT VI · LESSON 02

국권 피탈과 극복

1910년 8월 29일 — 대한제국이 멸망했다. 그러나 한반도는 굴복하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의 만세 함성, 임시정부의 깃발, 안중근·윤봉길·유관순의 이름. 35년의 어둠 속에서 켜진 등불.

LEARNING GOAL성취기준
9역13-02 일제 식민 통치·3·1 운동·임시정부·독립 운동을 살펴보고, 광복과 분단의 의미를 이해한다.
SECTION · 01

일제 식민 통치 35년 (1910~1945)

일본은 35년 간 한반도를 식민지로 통치했다. 시기마다 통치 방식이 달랐다 — 1910년대 무단 통치, 1920년대 문화 통치, 1930년대 이후 민족 말살.

을사늑약
을사늑약 문서 (1905)외교권 박탈 — 1910 강제 병합의 전조.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1841~1909)초대 통감 —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사살.
안중근
안중근 (1879~1910)1909.10.26 하얼빈역에서 이토 사살. 1910.3.26 뤼순 감옥에서 순국.

⛓ 일제 식민 통치 3시기

1910~1919

무단 통치

헌병 경찰 통치

총독부가 군대처럼 통치. 헌병이 경찰을 겸함. 교사도 칼을 차고 수업. 토지조사사업(1910~18)으로 농민의 토지를 약탈.

1919~1931

문화 통치 (기만)

3·1 이후의 변화

3·1 운동 충격으로 정책 변화. 겉으로는 신문 허용·교육 확대. 실제로는 검열 강화·친일파 양성·분열 통치. 산미증식계획(1920~34)으로 쌀 약탈.

1931~1945

민족 말살 통치

전쟁 동원기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 황국신민서사·창씨개명·신사참배·한국어 금지·강제 징용·일본군 위안부·학도병.

SOURCE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1910년 3월 뤼순 감옥에서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한 것이 한 사람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일이 아니라 일본의 동양 침략 정책이 동양 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이며, 한·일·청 3국이 평등하게 협력하는 동양 평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이러한 구상을 『동양평화론』으로 쓰다가 사형이 집행되어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미완)과 뤼순 법정 진술의 요지 (1910)
SECTION · 02

3·1 운동 (1919) — 200만의 함성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태화관에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 학생·시민들이 만세를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한 달 만에 전국 200만이 거리로.

3·1 운동
3·1 운동 (1919) — 200만 명 참여전국 2,000여 곳에서 시위. 일본 헌병이 발포해 약 7,500명 사망·15,900명 부상·46,000명 체포·체포 후 7,000명 처벌.
유관순
유관순 (1902~1920)이화학당 학생. 충남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 → 서대문 형무소에서 17세에 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1919)3·1 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수립. 27년 간 광복까지 활동.
김구
김구 (1876~1949)임시정부 주석. 한국광복군 창설(1940).

📜 3·1 운동의 전개

1919.1.21
고종의 의문사 · 분노 확산
덕수궁에서 고종 사망. 독살설이 퍼지며 백성의 분노 확산. 장례식 준비가 운동의 도화선.
1919.2.8
도쿄 유학생 2·8 독립 선언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먼저 독립 선언 → 3·1 운동의 직접적 자극.
1919.3.1
독립선언 · 만세 시위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같은 시각 학생들이 탑골공원에서 낭독). 손병희·이승훈·한용운·길선주 등. 만세 시위 전국 확산.
1919.3~5
전국 확산 · 200만 참여
2,000여 곳에서 시위. 약 200만 명 참여. 도시 → 농촌 →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로 확산. 일본 헌병의 발포·진압. 제암리 학살(4.15) — 일본군이 마을 전체를 불태움.
1919.4.1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상하이)
3·1 운동의 결과 —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처음 사용. 민주공화제 채택. 한반도 역사상 첫 공화국.
SOURCE · 독립선언서
1919년 3월 1일 — 민족 대표 33인 명의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 아아, 신천지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 최남선 작 · 손병희 등 33인 서명 (1919.3.1)
DEEP DIVE · 3·1 운동의 의의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

3·1 운동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그 의의는 여러 층위가 있다.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 — 200만 참여, 2,000여 곳 시위, 종교·계층·지역을 넘어선 연대.
임시정부 수립의 모태 — 1919.4.11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한반도 역사상 첫 민주공화국.
일제 통치 정책 변화 — 1910년대 무단 통치 → 1920년대 문화 통치(기만적이지만).
세계사 속의 사건 —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9년, 식민지 곳곳에서 저항이 터져 나왔다. 3·1 운동은 그 흐름에서 가장 이른 대규모 운동이었고, 중국 5·4 운동(1919.5.4)에 직접 자극을 주었다. → 아래 SECTION 03에서 자세히.
대한민국 헌법의 출발 —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 곧 3·1은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법적·정치적 정통성의 기원.

"3·1 운동은 단순한 시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식민지 백성이 처음으로 '우리는 한 민족이며, 독립된 국가의 자유 시민이다'라고 선언한 사건이었다. 이 순간부터 한국 현대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 한국 사학계의 공통된 평가
SECTION · 03

세계사 속의 3·1 운동 — 1919년, 식민지들이 함께 흔들렸다

3·1 운동은 한반도만의 사건이 아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한 해 동안 조선·중국·인도·이집트·베트남에서 식민 지배에 맞선 움직임이 잇달아 터져 나왔다. 왜 하필 같은 해였을까?

🌏 1919년, 여섯 달의 세계 지도

1919년 1월부터 6월까지, 파리·도쿄·서울·카이로·암리차르·베이징에서 잇달아 터진 순서.

1919. 1월 7월 파리 강화 회의 1.18 도쿄 2·8 선언 서울 3·1 운동 이집트 3.8~ 인도 4.6 · 암리차르 4.13 중국 5·4 운동 베트남 청원 6.18
1918.1.8
윌슨의 14개조 — 민족자결주의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 원칙 14개조를 발표했다. 그 안에 민족자결(民族自決) — 각 민족의 일은 그 민족이 스스로 정한다는 원칙이 들어 있었다. 1918년 11월 11일 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이 말은 식민지 곳곳에서 독립의 근거로 읽혔다.
1919.1~2
파리 강화 회의 · 김규식 파견
1월 18일 파리에서 전후 처리 회의가 열렸다. 상하이의 신한청년당김규식을 대표로 뽑아 1919년 2월 파리로 보냈다. "우리 문제를 세계 회의의 안건으로 만들자"는 것. 이 파견 소식이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 선언(2.8)과 국내의 준비를 재촉했다.
1919.3.8~
이집트 — 자글룰 추방과 전국 봉기
영국이 독립을 요구하던 사드 자글룰을 3월 8일 체포해 몰타섬으로 추방했다. 이집트 전역에서 학생·공무원·농민이 들고일어났고, 3월 후반 진압 과정에서 약 3,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집트는 1922년 형식적 독립을 얻는다.
1919.4.6 · 4.13
인도 — 로울라트법 반대와 암리차르 학살
영국이 재판 없이 가둘 수 있는 로울라트법을 만들자, 간디는 4월 6일 전국 파업(하르탈)을 호소했다. 4월 13일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바그 광장에서 영국군이 집회 군중에게 발포해 수백 명이 숨졌다. 이 사건이 이듬해 비폭력 불복종 운동(1920)으로 이어진다.
1919.5.4
중국 — 5·4 운동
파리 강화 회의가 산둥반도의 독일 이권을 중국이 아닌 일본에 넘기기로 하자, 5월 4일 베이징대 학생들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는 전국의 노동자·상인에게 번졌다. 베이징대 교수 천두슈는 5·4가 터지기 전 조선의 만세 운동을 두고 "위대하고 진실하며 비장하다"고 썼다.
1919.6.18
베트남 — 파리로 보낸 8개조 청원
파리에 살던 청년 응우옌아이꾸옥(뒷날의 호찌민)이 베트남인의 요구 8개조를 강화 회의에 보냈다. 언론·집회의 자유, 프랑스인과 같은 법적 권리 등. 답은 오지 않았다. 그는 이 실망 뒤에 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민족자결주의의 그늘 — 왜 우리 요구는 다뤄지지 않았나

윌슨이 말한 민족자결은 실제로는 패전국(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던 땅에 주로 적용되었다. 일본은 승전국인 연합국 편이었다. 그래서 한국 문제는 파리 강화 회의의 안건이 되지 못했고, 김규식이 낸 독립 청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베트남의 청원도, 이집트 대표단의 파리행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 기대와 배신이 1919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회의장에서 길이 막히자, 사람들은 거리에서 스스로 답을 만들기 시작했다. 3·1 운동도, 5·4 운동도, 암리차르의 군중도 그 답이었다.

✍️ 탐구 — 1919년을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자

위 연표에서 사건 두 가지를 골라, 그 둘의 공통점 하나차이점 하나를 근거(연도·인물·장소)를 들어 써 보자. 정해진 정답은 없다. 스스로 채점하지 않아도 된다.

SECTION · 04

25년의 독립 운동 — 무장 투쟁·외교 활동·의열 활동

3·1 운동 후 독립 운동은 여러 갈래로 전개되었다. 만주의 무장 투쟁,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의열단·한인애국단의 의열 활동, 그리고 국내의 실력 양성 운동.

김구와 윤봉길
김구와 윤봉길 (1932.4.29)홍커우 의거 직전. 윤봉길이 도시락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 등 사살.
임시정부
임시정부 청사 (상하이)1919~1945 — 27년 간 광복까지 한국 정통 정부.
광복
1945년 8월 15일 광복일왕의 항복 방송 — 마침내 빛.

⚔️ 독립 운동의 여러 갈래

⚔️ 무장 독립 투쟁

1920 봉오동 전투(홍범도)·청산리 대첩(김좌진)·한국독립군(지청천)·조선혁명군(양세봉). 1940 한국광복군(임시정부 산하). 1945년 미국과 공동작전(독수리 작전) 직전 광복.

📜 외교 독립 활동

임시정부의 파리 강화 회의 활동(김규식)·미국 워싱턴 군축 회의·이승만의 미국 활동. 1943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 보장" 명문화.

💣 의열 활동

의열단(김원봉·1919): 김상옥(종로경찰서)·나석주(동척)·김지섭(도쿄). 한인애국단(김구·1931): 이봉창(1932 도쿄 천황 폭탄)·윤봉길(1932 상하이 홍커우).

📚 실력 양성·문화 활동

물산장려운동(1920)·민립대학설립운동(1923)·광주학생항일운동(1929)·조선어학회(1929~) 한글 보급. 이육사·윤동주·심훈 등 문학 저항.

SECTION · 05

1945년 8월 15일 — 광복, 그리고 분단

35년 만의 광복.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자유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분단의 시작이었다.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미·소 군정 통치가 시작된다.

🌅 광복과 분단의 흐름

1943.11
카이로 회담 — 한국 독립 약속
미국 루스벨트·영국 처칠·중국 장제스가 회담. "한국 인민이 받고 있는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가 되게 할 결의를 한다". 한국 독립의 국제적 약속.
1945.8.6 · 8.9
원자폭탄 · 소련 참전
미국이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8월 9일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 후 만주·한반도 북부 진격.
1945.8.15
광복
일왕 히로히토의 무조건 항복 방송(정오). 한반도 전역에서 만세 함성. 35년의 식민 통치 끝. 거리에는 태극기가 휘날렸다.
1945.9~
38선 분할 점령
미국 제안으로 38선을 경계로 남(미군)·북(소련군) 분할 점령. 명목은 일본군 무장 해제. 분단의 시작.
1945.12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한국에 5년 신탁통치 결정. 국내 격렬 반응 — 신탁 vs 반탁. 좌·우 대립 본격화.
1948.8.15 · 9.9
남북 분단 정부 수립
8.15 대한민국(이승만·서울), 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평양). 분단의 고착.
SECTION · 06

참 / 거짓 — 8문제

🇰🇷 국권 피탈과 극복 참·거짓 8문제

0 / 8

각 진술의 참/거짓을 선택. 모두 선택한 후 "정답 확인"을 누르면 해설이 나온다.

안중근은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고,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며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참. 1909.10.26 하얼빈역에서 이토 사살, 1910.3.26 뤼순에서 사형. 미완성의 『동양평화론』 — 한·청·일이 평등하게 협력해야 한다는 사상.
3·1 운동은 1919년 1월 1일 시작되었고, 약 1만 명이 참여했다.
거짓. 3·1 운동은 1919년 3월 1일(이름의 유래) 시작. 약 200만 명이 참여한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 2,000여 곳에서 시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수립되었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를 처음 채택했다.
참. 1919.4.11 상하이에서 수립.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처음 사용, 민주공화제를 헌법으로 채택 → 한반도 첫 공화국. 1945년까지 27년 활동.
유관순은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을 주도하며 파리 강화 회의에 참여했다.
거짓. 유관순(1902~1920)은 이화학당 학생으로 3·1 운동에 참여, 4월 천안 아우내 장터 만세를 주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17세에 옥사. 파리 강화 회의 활동은 김규식.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군 사령관 등을 사살했다.
참.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 단원. 도시락 폭탄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 등 사살. 장제스가 "중국 100만 대군도 못한 일"이라 평. 이 사건이 중국 국민당이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계기.
1920년대 일제의 통치는 1910년대 무단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변했지만, 실제로는 검열·분열 통치가 강화된 기만적 정책이었다.
참. 3·1 운동의 충격으로 정책 변경. 겉으로는 신문·교육 허용, 실제로는 친일파 양성·검열 강화·분열 통치.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쌀 약탈은 계속.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영국·일본이 한국 독립을 약속했다.
거짓. 카이로 회담(1943.11)은 미국 루스벨트·영국 처칠·중국 장제스가 참가. 일본은 적국. "한국 인민이 받고 있는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가 되게 할 결의"를 명문화.
광복 후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분할 점령했고, 결국 1948년 남북에 별도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참. 1945.9 38선 분할 점령 시작 → 1948.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승만)·1948.9.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김일성). 분단의 고착.
SECTION · 07

한 줄로 정리하면

핵심 정리

  • 1910년 8월 29일 국권 피탈 → 35년 식민 통치. 시기별로 무단(1910s)→문화 통치(1920s)→민족 말살(1930~45). 토지조사·산미증식·창씨개명·강제 징용·위안부.
  • 1919.3.1 만세 운동: 200만 참여, 2,000여 곳. 독립선언서·유관순. 4.11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 — 한반도 첫 공화국.
  • 세계사 속 1919년: 1차 대전 종결과 민족자결주의의 기대 → 파리 강화 회의(1.18)에서 좌절 → 서울 3·1(3.1)·이집트(3.8)·인도 하르탈(4.6)·중국 5·4(5.4)·베트남 청원(6.18). 3·1은 그 흐름의 첫 신호였고 5·4에 자극을 주었다.
  • 독립 운동 4갈래: 무장 투쟁(봉오동·청산리·광복군) + 외교(임시정부) + 의열(안중근·이봉창·윤봉길) + 실력 양성(조선어학회·문학).
  • 1909 안중근 의거(이토 사살). 1932 이봉창(사쿠라다몬)·윤봉길(홍커우) — 한인애국단(김구).
  • 1945.8.15 광복(원폭·소련 참전) → 카이로 회담의 약속 실현. 그러나 38선 분할 점령 → 1948 남북 분단의 비극.